2009년 10월 05일
험 제목을 뭐라고 할지 몰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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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타리아와 관련된 절대 빠질 수 없는 단어들 몇개 간단한 설명(?) 들어갑니다.
짧막하게 뜻만 긁어와 편집했는데도 길군요-_-
the Axis powers
추축국(독일어: Achsenmächte, 이탈리아어: Potenze dell'Asse)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의 반대편 나라들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패전국이 되었다. 주요 추축국인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자신들을 가리켜 "로마·베를린·도쿄 축"이라고 부른 것에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
연합국과 마찬가지로 추축국에 속하는 나라들도 전쟁의 경과에 따라 계속 바뀌었으며 전쟁 초기에 추축국에게 점령당하여 추축국에 가담하였다가 전세가 뒤집히자 연합국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제2차 세계 대전 (第二次世界大戰, World War II)
제2차 세계 대전 (第二次世界大戰, World War II)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다. 통상적으로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련군이 1939년 9월 18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함으로써 발발하였다고 본다. 한편에선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화민국 침략, 1939년 3월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미국의 원자 폭탄 투하 이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이 결과로 한국, 타이완 등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였다.
전사자는 약 2500만 명, 민간인 희생자도 약 4천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1937년 중국 침략 때 난징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 겁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1944년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통해 일본인을 비롯한 조선인, 중국인, 동남 아시아인 등 여러 나라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하였으며,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였다. 또한 미국은 1945년 3월 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15만 명을 살상했고(재일 조선인 포함), 같은 해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감행하여 약 34만 명을 살상하였으며, 영국과 미국의 공군은 드레스덴과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의 피해는 극히 심하였다.
전쟁은 크게 서부 유럽 전선, 동부 유럽 전선과 중일 전쟁·태평양 전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유럽 전선만을 얘기할 경우 히틀러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파시즘
파시즘(이탈리아어: fascismo 파시스모[*] [faʃ'ʃi:smo], 영어: fascism 패시즘[*] [ˈfæʃˌɪz(ə)m])은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며 권위적, 민족주의적인 정치 이념이자 협동조합주의 경제 사상이다.
파시즘은 자국의 국민, 국가, 인종이 이를 구성하는 개인, 기관, 무리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찬양한다. 파시즘에서는 일당제를 옹호한다. 파시즘 정부는 정부와 파시즘 운동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금지하고 억압한다. 파시즘은 계급 투쟁에 반대하는데, 자본주의적 자유 민주주의가 계급 투쟁을 만들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이 개념을 이용한다고 하여 양자 모두를 비판한다. 파시즘은 개인주의, 합리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에 반대하는데, 이렇듯 파시즘에서 반대하는 것, 학자들이 '파시즘이 부정하는 것(fascist negations)'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파시즘을 더욱 잘 정의할 수 있다. 경제 분야에서 여러 파시즘 지도자들은 "제3의 길" 경제 정책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과격한 개인주의와 국가 공산주의의 엄격한 통제보다 자신들의 정책이 더 우월하다고 본다.. 이것은 정부가 기업과 노동에 대해 상당한 통제를 가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무솔리니는 자신의 국가 체제를 "협동 국가"라고 칭하였다) 파시즘은 대중영합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영웅적인 노력을 요구하며, 단일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강제하여 심지어 개인숭배까지 이른다. 파시즘은 보편적이고 단적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역사가들과 정치학자들은 파시즘을 간결히 정의할 때 어떤 요건이 들어가는지에 대해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 패배하고, 당시 파시즘 정부가 저지른 잔혹 행위가 알려지면서 '파시즘'이란 말은 멸칭으로 쓰이게 된다.
파시스트 모토와 유명한 표현
이탈리아어: Me ne frego! 메 네 프레고 : 나는 그것에 나 자신을 바친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이탈리아 파시스트 모토)
이탈리아어: Libro e moschetto! 리브로 에 모스케토 : 책과 총을 들면 완벽한 파시스트가 된다!
이탈리아어: Viva la Morte! 비바 라 모르테 : 희생 만세!
이탈리아어: Tutto nello Stato, niente al di fuori dello Stato, nulla contro lo Stato. 투토 넬로 스타토, 니엔테 알 디 푸오리 델로 스타토, 눌라 콘트로 로 스타토 :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항하는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어: Credere Obbedire Combattere! 크레데레 오베디레 콤바테레 : 믿고 순종하며 싸우자!
네오나치즘(신나찌주의)
신나치주의는 1920년대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독일을 지배했던 나치즘의 부활을 추구하거나 나치즘의 특징인 극우, 민족주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다. 네오나치즘(neo-Nazism)이라고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신(新)국가사회주의"로 보곤한다.
신나치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신나치라 하지 않고, 주로 국가사회주의자나 그에 관련된 말을 써서 부른다.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사회적 매장과 법적책임을 피하기 위해 나치에 관련 혹은 비슷한 용어를 쓰는 것을 피하고 있다. 현재 유럽 여러 국가들은 나치, 인종 차별, 반유대주의에 대해 찬양하여 표현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나치 독일이 사용했던 빨간색-하얀색-검은색으로 색칠된 스바스티카 (Swastika), 지그 룬 (Sig Runes) 같은 인도-아리안 심볼을 사용한다.
신나치주의는 국제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으며, 최근 이스라엘을 포함해 현재 많은 국가에서 이러한 사상에 관련된 조직이 생겨나고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B%82%98%EC%B9%98%EC%A3%BC%EC%9D%98)
제국주의
제국주의(帝國主義)는 한 나라의 정치·경제적인 지배권과 헤게모니를 다른 나라, 지역, 식민지 등으로 확대시키려는 정책, 또는 그러한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을 가리킨다.
어원
제국주의(Imperialism)는 제국을 가리키는 임페라토르(Imperator)에서 왔으며 이는 원래 로마의 황제를 뜻하는 말이었다. 유럽의 역사상 많은 국가나 왕이 로마 제국을 모델로 스스로 제국임을 선포한 것에서 그들이 취하였던 팽창주의 정책 및 사상을 제국주의라 부르게 되었다. 제국주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등에서 비판적인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제국주의라는 낱말 자체는 그 이전부터 흔히 쓰였던 말이다.
원인
유럽의 초기 식민지는 희귀한 자원과 노예의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남아메리카의 은, 아프리카의 금, 상아와 노예, 인도의 후추등이 대표적인 목표물이었다. 이후 산업혁명은 대량생산을 위해 보다 많은 자원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동시에 생산된 제품을 판매할 판매처가 필요했다. 당시의 대표적인 식민무역은 영국의 경우 인도의 값싼 노동력과 면화로 면직물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인도에서 아편과 바꾼 후 중국에서 은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중에 아편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식민지는 에너지및 자원의 확보와 자본 투자처로서 더욱 유용해졌다. 이를 위해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에 척식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영국의 동인도회사나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그것이다.
역사
넓게는 대항해 시대이후 유럽의 각 나라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 대해 크고 작은 식민지를 만들고 자원과 노동력을 약탈하던 때부터 제국주의의 시작이라 간주하나, 좁은 의미의 본격적인 제국주의는 산업혁명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앞다투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18세기 무렵부터 나타났다. 제국주의의 전성기였던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시기에 이르러 세계는 이른바 열강이라 불리던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로 양분될 지경에 이르렀으며 에티오피아와 타이 등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열강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식민지들은 대부분 격렬하게 제국주의에 저항하였으며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독립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식민지에 대한 옛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 경제적 영향은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간접적인 방식의 제국주의를 기존의 제국주의와 구분하기위해 신 제국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난징대학살
중일 전쟁 도중,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5만 내지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39년 4월에는 1644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등 자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 부르고있으며, 일본에서는 '난징 사건'으로 불리고있다.
대학살 배경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마르코폴로 다리, 노구교라고도 불린다.)으로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무력 사건이 터짐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초기에 일본군은 베이징,톈진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하고,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일본군 수뇌부는'단 3개월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 쳤을만큼 기세등등했었다.
그러나, 상하이 상륙작전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되었는데,여기서 일본군이 예상한것과는 달리 중국 국민당군의 저항이 상상 이상이였다. 특히 국민당군의 장제스의 엘리트 직계군대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었는데, 여기서 일본군은 상당한 굴욕감을 맛보게된다. 그리고 11월, 일본군은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예정도없이 곧바로 중국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향해 진격을 한다.
대학살 전개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할동안, 중국 국민당 정부는 수도 난징을 버리고 충칭(중경)으로 옮긴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성을 삼면에서 좁혀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속에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명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갈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등 뒤엉켜 아수라장이였다. 난징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고 권고및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성을 지키고있던 탕셩즈(唐生智)사령관 휘하의 15만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난징성 안에 머물며 고립한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방식으로나갈려했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결국 역시 중국군은 끝까지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성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국민당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흐뜨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되었던것에 큰한몫을 했다. 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본채로 뒤숭숭한 혼란속에 빠져있기만했다.
그무렵, 난징성이 함락직전되기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는 자신의 휘하 중국군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을 쳤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채 남아있던 5~60만의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인들은 공황상태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대량학살을 겪게된다.
6주간의 학살과 강간
탕셩즈(唐生智)사령관은 도망가면서, 난징성이 허무하게 일본군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일본군들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거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 이른바,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로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에 보이는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난징 안전지대
독일 나치스당원이자 지멘스의 직원으로 난징에 근무하던 욘 라베는 외교관,사업가등 난징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과 힘을 합쳐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신의 자택과 대사관 부지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이 들어올수 없도록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이곳에서 피난하는 중국인들에게 음식과 머물곳을 제공했었다. '난징 안전지대'에 전체 약2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일본군들로부터의 대피와 은신처및 음식을 제공받았었다.
파나이호 사건
파나이호 사건은 1937년 12월, 난징대학살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에 난징 인근의 양자강 유역에서 일본해군에 의하여 당시 난징인근 양자강 유역을 순찰중이던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의 경비정인 파나이호를 침몰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였고, 미국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00인 참수 경쟁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 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 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斬首)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던것을 말한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도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와 함께 총살되었다.
대학살 이후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함락된이후 6주간의 대학살이 계속되었고 1938년 봄에야 비로소 종결되었다. 그후 일본군은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일본정부는 난징에 있는 사람들을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 따라 편재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었다. 1938년 1월 1일, 일본은 새로운 시 정부인 '난징자치 위원회'를 구성했다. 난징자치위원회는 도시의 행정,복지,금융,상업,치안,교통등 담당하는 중국인 관리들로 구성되어 일본의 꼭두각시역할을 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통제 정책은 너무도 가혹하게 다뤘다. 1939년 4월에는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마루타(통나무)같은 형식의 실험대상을 모아 생체실험 연구를 하곤했었다. 이를 'Ei 1644부대'라 불리는데, 매주 10여명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 사체는 'Ei 1644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되었다. 이어서 1940년에는 왕징웨이를 정부수반으로 친일 꼭두각시 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이 난징을 수도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민중들은 왕징웨이 정권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Ei 1644부대등 일본군,일본인들은 중국 국민당군이 난징에 입성하기전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 도주했다.
난징전범재판
난징전범재판은 1946년 8월~1947년 2월까지 난징에서 B급,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1천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460여건의 살인,강간,방화,약탈에 관해 증언했었다.
재판이 계속되면서 감춰졌던 증거들이 속속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일본신문에 '100인 참수경쟁'실렸던 기사로 나온 노다 다케시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중위가 재판받게 된다. 두사람은 '살인시합'을 벌인 장본인이였는데, 재판도중 둘다 150명 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일체부인했으며 급기야 한사람은 외국인 특파원이 멋대로 상상해 기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사람은 일본에 돌아갔을때 아내를 놀라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둘은 1947년 12월 18일 평결이 내려져 사형을 언도받는다.
또한 난징전범재판에서 타니 히사오중장 역시 관심의 대상이였다. 그는 1937년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이였는데, 일본군 6사단은 난징 시내에서 온갖 많은 만행을 저질러왔던 부대였다. 1946년 8월, 재판에 회부된 히사오 중장은 난징으로 소환되었다. 그를 기소하기위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난징시내 근처에 있는 매장지를 파헤쳐 수천구의 유골을 발굴했다. 1947년 2월 6일, 히사오에 유죄판결 내려지면서 3월 10일 타니 히사오중장은 전쟁법과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고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명 학살한것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으면서 공개총살 집행된다.
극동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한 재판이다. 도쿄 재판이라고도 한다. 60여 명 이상의 전쟁 범죄 용의자로 지명된 사람 중 28명이 기소되어, 판결 이전에 병사한 사람 2명과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중 난징 대학살에 관련된 전범들 가운데 당시 난징대학살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일본 황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해, 재판소에 출석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는 사형판결받아 교수형 당했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였던 히로타 고키도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했다. 하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은 난징대학살 당시 주요 범죄자들에 대해서는 단한명도 법정에 서지않았다는점이 한계다.
한일합방(한일병합조약)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은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멸망하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도 부른다.
특이한 점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성립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병탄(倂呑)
일본 제국은 병합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두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에게 ‘병합청원’의 시나리오를 준비시키고 있었다. 송병준은 이에 앞서 1909년 2월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 매국흥정을 벌였다.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에게 ‘합병’을 역설한 바 있었으나 일본 제국 측의 병합 계획 때문에 일이 늦어지게 되자 직접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서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 등 일본 제국의 조야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흥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이완용은 송병준의 이런 활동을 눈치채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緑)와 합방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제국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아 고마쓰 미도리와 교섭에 나서도록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려는 전술이었다.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시켜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라면서 자기 휘하의 내각이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 이런 시나리오를 연출시키면서 일본 제국은 점차 ‘병합’의 시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판단,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내세우고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하여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다.
또한 일본 제국은 조약이 누출되어 조약에 반대하는 소요 등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나남·청진·함흥·대구 등에 주둔한 일본제국군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야밤을 틈타 서울로 이동시켰다. 조약 체결일인 8월 22일 응원병력과 용산에 주둔한 제2사단이 경비를 서게 된다.
불려온 대신들 중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이후 이른바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8명 친일파 대신은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였다. 이 8명은 한일합방 이후 공을 인정받아 작위를 수여받았다.
합병전문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합병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1.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
2.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넘겨준다고 지적한 것을 수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3.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서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받도록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연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4.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의 조항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손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받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5.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준다.
5. 일본국 정부는 앞에 지적된 병합의 결과 전 한국의 통치를 담당하며 이 땅에서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변과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주는 동시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6. 일본국 정부는 성의있게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7. 일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의 결재를 받을 것이니 공포하는 날로부터 이 조약을 실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두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이름을 쓰고 조인한다.
대한민국과 일본국의 무효 재확인
합법론 : 일본은 한일 합방조약을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병합 합법론의 중요한 근거로 내세우는것은 '조약문 자체에서 형식적인 문제가 없으며, 국제법상 조약에 준수한 조약이라는것'이다. 즉, 일본제국은 을사늑약이 가졌던 여러 가지 부당함을 의식했던 것인지 한일병합조약에는 위임장, 조약문, 황제의 조칙 등 형식적인 문서들이 갖추어져 있기때문에 한일병합은 불법적인게 아닌 합법적이라는것이 주 견해이다.
또한, 국제학술회의에서 영국 학자들이 한일병합의 불법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발언을 했는데, 학술회의에서 영국의 국제법 전문가인 J. 크로포드 케임브리지대 교수등은 "스스로 살아나갈 수 없는 국가에 대해 주변국가가 국제적 질서의 관점에서 그 나라를 취하는 것은 당시 흔히 있었던 일"이라며, "한일합방 조약은 국제법상 불법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바 있었다.]
불법론 : 이 조약에는 순종 황제의 최종 승인 절차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순종의 위임장은 강제로 받아낼 수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최종 비준을 받는 절차가 생략되었다.
그 증거는 조약문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항 제8조에는 '양국 황제의 결재를 받았다'고 적고 있으나, 조약문의 어떤 내용도 최종 비준 이전에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상기할 때 재가 사실을 미리 명시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병합을 최종적으로 알리는 조칙에는 옥새는 찍혀있지만 순종의 서명이 빠졌다는 점이다. 조직이 성립하려면 옥새와 함께 서명이 들어가야 하는것인데, 결국 한일합방조약은 불법적으로 자행되었었다는 것은 옥새와 그에 따르는 의전절차가 무시되었다는것을 통해서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한일합방조약을 알리는 황제의 칙유가 일본정부에 의해 작성됐으며, 순종이 이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거나 하지 않은 사실이 자료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8월 29일 공포된 황제칙유에는대한국새가 아닌1907년 7월, 고종황제 강제 퇴위 때 일본이 빼앗아간 칙명지보(국가간의 조약에는 국새가 찍혀야 하는데, 칙명지보는 행정결제용 옥새를 말한다.)가 찍혀 있다는 점과 1907년 11월 이후 황제의 조칙문에 날인해온 황제의 서명 ‘척(拓)’(순종의 이름)이 빠져 있는 점을 들었다. 당시 순종은 일본 측의 강제병합에 직면해 전권위원위임장에는 국새를 찍고 서명할 수밖에 없었으나 마지막 비준절차에 해당하는 칙유서명은 완강히 거부했다.
이어서 이태진 교수는 “한일강제합방조약의 법적결함은 결국 국제법상으로만 보아도 조약불성립론을 입증하며 1910년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식민통치도 아니고 일본이 한국을 불법적으로 강점한 상태”라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순종황제의 조칙은 재가란에 어새 칙명지보만 찍히고, 당연히 있어야할 황제의 이름자 ‘척’ 서명이 없다. 대한제국의 옥새는 통감부가 빼앗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날인 만으로 결코 황제의 제가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것이 불법론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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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밸리로(...)
# by | 2009/10/05 23:11 | 트랙백 | 덧글(0)




